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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 생태관광의 寶庫 ‘연천군’
  • 이영석 기자
  • 업데이트2020-10-24 19:06:32
연천DMZ생태관광 스터디투어
(사)한국관광클럽 회원 등 50명 참가
 

()한국관광클럽(회장 이용기)1019일 이용기 한국관광클럽 회장과 회원사 및 언론사 35명과 정길영 광주광역시관광협회장과 회원사, 표한주 인천광역시관광협회 회장 등 총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천DMZ생태관광 스터디투어12일 일정으로 진행했다.
 

이번 스터디투어는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돼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로 유명한 연천군 전곡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연천 7경 중 으뜸인 재인폭포, 5일 장터가 열린 전곡시장, 고려 4(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경순왕릉, 호로고루성, UN군 화장장, 연천고랑포역사공원을 시찰했다. 열쇠전망대(육군 5사단)는 아프리카 돼지열병 확산 우려로 취소돼 아쉬움을 남겼다.
 



숙소는 연천군의 유일무이한 18홀 골프장을 보유하고 있는 백학리조트골프텔에서 여정을 풀었다.

 

이번 스터디투어를 진행한 이용기 한국관광클럽 회장(푸른바다여행사 대표)작년부터 광주와 호남지역을 주축으로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은 DMZ생태관광 상품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왔다한반도 인류의 기원을 볼 수 있는 평화도시 연천군은 DMZ생태관광의 보고로 국내는 물론, 인바운드관광상품으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연천군과 한국관광클럽은 이번 스터디투어 개최 이후, MOU를 체결해 계절별로 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 지속적으로 관광객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저녁만찬에 참석한 김광철 연천군수는 인사말을 통해 군사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관내에 산재된 뛰어난 자연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발굴, 관광 자원 활용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연천군은 최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계기로 '재인폭포공원화' 사업을 통해 기존의 스카이워크 전망대 외에 150m 길이 출렁다리와 산책로, 전망대를 새로 설치하면서 대형 주차장까지 완비하는 등 새로운 생태관광지로 본격적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2022년까지 1천만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올해 연천 방문의 해를 선포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으로 선포식을 취소했지만, 우리나라 최대 DMZ생태관광지와 선사시대 유적을 통해서 세계적인 생태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연천군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답사를 통해 이용기 ()한국관광클럽 회장은 연천군은 최전방 비무장지대(DMZ)와 선사시대 유적지를 비롯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재를 계기로 수도권의 새로운 생태관광 寶庫로 떠오르고 있다""한국관광클럽 회원사들과 함께 많은 관광객 유치"를 약속했다.
 
 
전곡선사박물관
 

1978년 동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불러일으켰던 연천 전곡리유적에 건립된 세계적인 규모의 선사박물관이다.
 

원시 생명체의 신비로운 곡선을 모티브로 건립된 전곡 선사박물관은 실물 비례의 다양한 구석기시대 조형물과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관람객들이 쉽고 즐겁게 선사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체험형 박물관이다.
 

상설전시실 주요코너에서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바닥에 표시된 시간의 선(점선)을 따라 전시실에 들어서면 전곡의 주먹도끼, 인류진화의 위대한 행진, 사바나의 최초인류, 최초의 아시아 이주인, 추가령지구대 고인류의 터전, 전곡의 지증, 선사시대의 문화와 믿음(동굴벽화), 극지로 가는 구석기인, 고고학 체험센터, 몰핑스테이션 등을 경험할 수 있다.
그중 몰핑스테이션은 RFID카드를 이용해 각 진화 단계별 인류들과 자신의 모습을 합성시켜 자신이 선사시대에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
 
새롭게 단장한 재인폭포
 

연천 7경 중 으뜸가는 경치로 꼽히는 재인폭포 86억원을 들여 150m 길이의 출렁다리와 산책로, 전망대, 대형 주차장 등을 갖추는 사업을 벌여 이달 초 개장했다.
새롭게 단장한 산책로를 따라 입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재인폭포는 18.5m 높이의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에서 물이 쏟아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하천인 한탄강 유역은 독특한 지질과 지형적 가치로 지난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올해 7월 국내 4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승인됐다.
재인폭포는 다이아몬드처럼 부서지는 하얀 물살과 그 아래 에메랄드빛으로 펼쳐진 소()는 보는 순간 마음을 사로잡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연천을 굽이쳐 돌아가는 한탄강은 약 27만 년 전 분출된 용암이 식으면서 생긴 지형으로 곳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다.

 

재인폭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장 먼저 여행자를 맞는 것은 새로 만든 전망대다. 일명 스카이워크(sky-walk) 형태로, 투명한 유리바닥 위에 서서 발아래 펼쳐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인공 구조물이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장마 때 물이 불어 폭포 진입이 통제되던 때를 생각하면 노약자들도 멀리서나마 폭포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신비로우면서도 아찔하게 느껴지는 협곡을 조망하기에도 그만이다. 27m 높이의 전망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Y자 형태의 협곡이 이어진다. 계단을 내려서면서부터 폭포가 가까이 보인다.
 

웅장한 절리의 품에 안긴 재인폭포. 깨끗한 옥빛 물을 바라보면 심신의 고단함이 싹 가신다.현무암을 뚫고 자라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협곡 끝에 신비로운 자태의 재인폭포가 자리했다.
높이 약 18m의 폭포수가 너비 30m, 길이 100m의 소 위로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하는데, 하얀 물줄기와 에메랄드빛 소가 빚어내는 색의 조화가 거대한 동굴처럼 파인 현무암 주상절리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재인폭포는 원래 평지였던 곳이 갑자기 움푹 내려앉으며 지장봉에서 흘러내리던 계곡물이 폭포를 이루게 되었다.
폭포는 지금도 보이지 않게 변화하는 중이다. 폭포의 물살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주상절리를 조금씩 침식시켜 나갔고, 폭포도 조금씩 뒤로 물러앉게 되었다.
현재의 위치는 강변에서 350m 정도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 변화는 자연의 순리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저 폭포는 얼마나 더 뒤로 멀어질까?
재인폭포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인근 마을에 금실 좋기로 소문난 광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줄을 타는 재인이었던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마을 원님이 재인폭포에서 줄을 타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광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원님의 계략이었다. 줄을 타던 남편은 원님이 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폭포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원님의 수청을 들게 된 아내는 원님의 코를 물어버리고 자결한다. 그후로 사람들은 이 마을을 코문리라 부르게 되었고, 현재의 고문리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문헌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전설과는 또 다르다. 폭포 아래에서 놀며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던 재인이 사람들과 내기를 했다. “양쪽 절벽에 외줄을 묶어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소.” 사람들이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의 아내를 내기에 걸었다. 재인이 쾌재를 부르며 호기롭게 줄을 타자 아내를 빼앗기게 된 사람들이 줄을 끊어버렸다. 흑심을 품었던 재인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후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재인폭포는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광대 재인과 관련된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숭의전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정종1)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세종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 만을 봉향토록 했다.
1451(문종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문종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숭의전을 600년 간 지켜온 두그루의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영원토록 숭의전 곁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해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곳),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 운조문(雲鳥門)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순왕릉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연천에 있다.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은 신라 56대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에 있어야 할 신라의 왕의 무덤이 왜 이곳 연천 땅에 있게 된 것일까?
경순왕이 원치 않던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때는 이미 신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였다.
780년 혜공왕이 피살되면서 시작되었던 진골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신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이 10년이 채 안 되는가 하면, 귀족들은 끝없는 탐욕에 눈이 멀어 다투었고, 그 사이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몰락하였다.
노비를 3천이나 거느린 귀족이 출현한 반면, 노비가 되거나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고향을 떠나 산 속에 숨어 도적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마침내 공공연히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조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신라여, 여왕이여, 부디 망하소서!”
왕실을 떠난 민심을 읽지 못하는 경문왕(景文王, 48)에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진성여왕(眞聖女王, 51) 때에 경주 거리에는 나무 망국 찰니나제라는 글귀가 뿌려졌다.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서 외웠던 염불 나무아미타불을 빌어 사람들은 신라여, 여왕이여, 제발 망하기를이라고 빌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관직을 버리고 서라벌을 떠났다.
고려의 태조 왕건. 경순왕의 항복을 받은 후 신라를 경주로 개칭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게했다.
서기 9279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자 당시의 경애왕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청했다. 하지만 고려의 군사가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은 서라벌에 당도해 왕을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그 일가친척 중 동생벌인 부()를 세워 왕을 삼았으니 그가 곧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왕위에 올라 경애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듬해엔 왕건이 기병을 거느리고 서라벌에 당도했다.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예의를 다해 그를 맞이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경순왕은 왕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화란을 초래했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쳐 놓았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리고는 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의 모든 사람들이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왕건 또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그로부터 3개월 이상을 경주 인근에서 체류하면서 수시로 경순왕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왕건의 부하들은 도적들의 침입을 막고, 궁중에 들어갈 때에도 예의를 차려 신라 백성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고 전한다. 개경으로 돌아와서도 왕건은 사자를 보내어 왕과 관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는 등 통일을 위한 포석을 깔아 나갔다.
천년 신라의 운명을 바꾼 결정
마침내 93510. 경순왕은 신라 사방의 땅이 모두 다른 나라의 소유가 되고, 국력은 약해져 도적이 들끓으니 도저히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정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여러 신하들은 옳으니 그르니 하며 의논이 시끄럽고 끝나지 않았다. 이에 태자 일()이 말했다.
나라가 보존되거나 멸망하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들로 더불어 민심을 수습해서 힘을 다해 본 후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이나 전승해온 나라를 남에게 쉽사리 내줄 수가 있겠습니까?”
경순왕은 이를 받아 말했다.
나라가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존될 수가 없다. 이왕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간뇌도지(肝腦塗地: 참혹한 죽임을 당하여 간장과 뇌수가 땅에 널려 있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애를 씀을 이르는 말)함은 나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국서를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태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을 고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마의태자이다.
경순왕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향했는데, 이때 말과 수레가 30여 리나 길게 늘어섰고, 길은 신라의 유민들과 구경을 나온 고려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려인이 된 경순왕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경순왕. 이곳에 잠들다. 왕건은 경순왕을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하게 하여 개경에서 살게 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나아가 태조 자신도 경순왕의 사촌과 혼인하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 욱()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비극적인 드라마를 살았던 경순왕은 마침내 978년 음력 44일에 개경에서 승하한다. 후손들과 신라의 유민들은 왕의 고향인 경주로 가서 장례를 지내고자 길을 떠났는데, 경주 김씨 가문에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신라의 유민들,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 수만 명이 장례행렬을 따라나서 개경 시내가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던 고려 조정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경순왕은 태조의 따님과 결혼하였으니 고려의 왕족이나 다름없다. 고려의 왕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도성 밖 100리 이상을 나가서는 안 된다. 돌아가신 경순왕이 왕으로서의 예를 받고자 하면 가던 곳에서 멈추어, 개경 도성 밖 100리 안쪽에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다.”라고 통보한다. 그리하여 왕의 주검은 길을 멈추고 개경에서 80리 거리인 경기도 장단군 남팔리, 현재의 장남면 고랑포리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순왕은 죽어서도 풍상에 시달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덤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조선 영조 때 지석을 발견하면서 무덤을 새로이 쌓았다. 그로부터 매년 31일과 101일을 기해 제사를 드리고 관군으로 하여금 능을 지키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수십년 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무덤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군 병사가 잡목 숲속에 쓰러져 있는 묘비를 발견, 국가사적 244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호로고루

호로고루는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약 28m 높이의 현무암 수직단애를 이루는 긴 삼각형 대지 위에 조성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이곳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感潮)구간의 상류에 위치하여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渡河)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위치한다.
평양지역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진격하기 위한 최단코스는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문산 방면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15정도 우회하여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일대의 임진강은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의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 조롱박과 같이 생겼다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린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호로)'''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져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벽 전체 둘레는 401m로 남벽 161.9m, 북벽 146m, 동벽 93.1m로 내부 면적은 606이다. 동쪽벽은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조사로 석축성벽이 구축되기 전 목책단계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임진강이 가지는 전략적 의미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한 고구려가 임진강유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면서 임진강유역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한 결과로 이는 성의 입지와 성내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유물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호로고루는 1991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고구려 유적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1998년 토지박물관에 의해 정밀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특히, 1차 발굴조사로 동쪽의 성벽 축조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성의 기단부와 중심부는 점토와 마사토로 판축을 하고 성벽의 내외면은 석축한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토성과 석축성의 장점을 모두 취해 내구성과 방어력을 높이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수도인 중국 집안(集安)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등에서도 확인된 고구려의 특징적인 축성기법으로 추정되고 있다.
2차 발굴조사에서는 성벽이전에 목책(木柵)을 구축한 단계가 먼저 있다가 이후 성토 및 정지작업을 거쳐 지상구조물인 동벽을 설치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성내에는 목책을 돌리고 토광시설을 사용하던 단계의 문화층과 성벽을 쌓고 기와건물을 사용하던 단계의 문화층으로 크게 구분된다. 지상구조물인 석축성벽을 구축할 당시는 성벽뿐 아니라 성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시행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토광과 지상 건축물, 지하식 벽체 건축물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용도에 맞게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로고루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구려 기와류이다.
또한 고구려의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로는 절풍이라고 하는 고구려 관모의 실질적인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유추할 수 있는 토제 모형이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도량형을 이해할 수 있는 저울추와 도침, 삼족벼루, 도침형태의 토제품 등 지금까지 출토 예가 없는 다양한 유물자료를 확보하였다.
창고시설에서는 쌀, , 조 등의 탄화곡물과 소, , 사슴, , 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 뼈가 수습되었으며 금속유물로는 화살촉과 도자류,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었다.
 
 
고랑포구역사공원
 

고랑포구는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임진강을 통한 물자교류 중심역할을 하던 나루터.
1930년대 개성과 한성의 물자교류를 통해 화신백화점의 분점이 자리잡을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쇠락했다. 또한 1.21 무장공비 침투사태의 침투로도 유명하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고랑포구의 새겨진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생상하게 구현, 재현해 가상·증강현실을 통해 실감나는 역사 및 안보 체험이 가능하며 아이들의 놀이공간과 다목적 공간(식사장소 포함) 및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다.
4개의 안내 및 관람구역은 만남의 찰라 삶의 찰라 역사와 문화의 찰라 오감의 찰라 순서로 진행된다.
 
연천DMZ생태관광 스터디투어 협찬
이정헌 경기지사장(30만원)/김우주 SNS국장(30만원)/ 이용기 회장(110만원)/정수연 대표(김밥+++각종음료 40만원)/이광현 대표(100만원)/박경만 부국장(20만원)/양은화 제주지사장(3박스)/임영자 대표(15만원, 목도리 60, 야관문2박스, 칡즙1박스)